[☀️데이] 고마운 우산에게🌂
나에겐 자그마한 붉은 우산이 있다.
이 우산의 원래 주인은 내가 아닌데,
어쩌다 이 우산을 쓰게 되었을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이 아이와의 첫 만남을 떠올려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 작은 우산은
우리 집 우산통에 슬쩍 둥지를 틀었다.
검은색을 선호하는 아버지와
장우산을 좋아하는 어머니에 의해
선택받지 못한 붉은 우산은
항시 구석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들려오는 비소식에
접이식 우산이 필요했고
때마침 구석에서 조용히 나를 지켜보던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사실 집어 들었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우산꼭지도 떨어지고
천마저 세월이 느껴지는 온전치 않은 모습까지,
겉보기에 믿을만한 구석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눈치도 없는 우산은 그저 신이 났다.
오랜만에 외출이라 즐거웠는지 위아래로 철컥거리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선택받았다는 걸 증명하듯 어깨를 으쓱이는 모양새였다.
철컥, 철컥, 철컥.
그래도 본연의 기능은 잃지 않았는지
빗방울은 제대로 막아주었다.
그래, 비만 안 맞으면 됐지.
이 정도면 쓸만한가 싶었다.
지하철역에 들어오니 사람들은
일제히 우산을 접어말기 시작했다.
나도 접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 우산,
생각지도 못한 재주가 있었다.
사람 당황스럽게 하는 재주 말이다.
보통 우산을 말면 고정을 위해 벨크로를 붙인다.
그런데 이 녀석은 벨크로를 붙여도
퉤, 하고 뱉어내기 일쑤였다.
붙이는 부위가 너무 오랜 세월에 해진 나머지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손으로 움켜잡아야 했다.
손잡이는 고리도 하나 없어
어딘가 걸어놓을 수도 없었다.
온갖 방법으로 애를 먹이는 참 대단한 우산이로구나.
그렇게 1년, 2년이 지나고, 3년이 되었다.
잠깐만 써야지 했던 것을 쓰다 보니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던 결점들도
이 우산만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니
점점 미운 정이 들고 말았다.
심지어 의외로 튼튼했다.
잘 말리지 않아도 녹이 슬지 않는 알루미늄 우산대,
탄성 좋은 플라스틱 우산살에
적당히 가벼운 무게까지,
몇 군데 성하지 않은 구석을 제외하면 막 쓰기 참 괜찮은 친구였다.
유일한 3단 우산이었다는 점도 인연의 시작이었지만
무던한 나의 성향이 인연을 이어오는 데도 한몫했다.
하지만 우연으로 시작된 만남도
이제는 끝을 고할 때가 된 걸까
내 곁을 지키던 그 자그마한 붉은 우산은
오늘,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지하철 환승을 기다리며
잠깐 앉아있던 자리 옆에 잠깐 놓았는데,
그만 잊고 가버린 것이다.
뚜루루루루루 출입문이 닫힙니다. 하고
문을 닫히는 사인이 두 번 울리자
나는 깨달았다.
“앗, 내 우산!”,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원래대로라면
다시 돌아가 가져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 우산과는 우연한 만남이었으니,
헤어지는 것도 우연이 작용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한 정거장을 지나치는 동안
여러 고민이 머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 기회에 버리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다 낡았는 걸.
다시 가기 귀찮기도 하고.
그런데 함께 한 시간이 길어서일까?
고작 작은 우산 하나일 뿐인데,
애처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우산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각에 골몰하는 동안
지하철은 금세 다음 역에 다다랐다.
결국 나는 우산을 위해 발길을 돌렸다.
내가 산 우산도 아니고,
쓰고 싶어서 쓴 것도 아니었지만,
이별만큼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게 내 우산과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예의이자, 낡은 몸으로 내 머리를 지켜준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우산은 다행히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 자리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은 태연하게 “왔어?” 하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우산과 우연찮게 만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우산이 나를 선택한 게 아니었을까?
나같이 물건에 애착을 가지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든 자신의 수명이 늘어날 테니 말이다.
나는 미우나 고우나 함께한
나의 우산에게 작은 고마움을 표했다.
우리가 비를 맞을 날은 앞으로도 많이 남아있겠지.
마지막까지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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